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글라브리오(기원전 67년 집정관) (문단 편집) == 생애 == 평민 가문인 아킬리우스 씨족의 일원으로, 기원전 122년 [[호민관]]을 역임한 마니우스 아킬리우스 글라브리오의 아들이다. 어머니 무키아는 고대 기록에서 기원전 133년 집정관이었던 푸블리우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 또는 기원전 117년 집정관 [[퀸투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 아우구르]]의 딸로 전해진다. 그는 기원전 115년 집정관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스카우루스]]와 기원전 119년 집정관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달마티쿠스]]의 딸인 카이킬리아 메텔라 달마티카의 친자녀이며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의붓딸인 아이밀리아 스카우라와 결혼했다. 그러나 기원전 82년 술라가 [[술라의 내전|내전]]을 통해 정권을 장악한 뒤 그를 압박해 결혼을 파기하고 아이밀리아를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와 재혼시켰다. 기원전 70년 법무관을 맡으면서 시칠리아 속주민들이 전임 총독 가이우스 베레스를 착취 혐의로 고발한 재판의 판사를 맡았다. 그는 이 재판에서 원고측 변호인을 맡은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의 탁월한 웅변에 감화되어 유죄 판결을 내리고, 이미 마실리아로 망명한 베레스의 재산을 몰수하게 했다. 기원전 67년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기원전 67년 집정관)|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와 함께 집정관을 맡았다. 두 집정관은 선거 사기 방지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에 따라 유죄를 선고받은 이들은 막대한 벌금을 내야 했고, 원로원에서 추방되었으며, 참정권을 영구적으로 상실했다. 기원전 67년 호민관 [[아울루스 가비니우스]]가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을 치르고 있는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가 [[미트리다테스 6세]]와의 전쟁을 금방 끝내지 못하고, 수많은 재물을 갈취하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그를 비티니아와 폰토스의 총독으로 선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관철되었고, 그는 한 때 루쿨루스의 군대를 인계받고 미트리다테스 6세와의 전쟁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한 데다 병사들이 그의 지휘력을 의심하며 반항하자, 결국 기원전 66년 루쿨루스에게 지휘권을 넘겨야 했다. 루쿨루스는 이후에도 약탈을 좀처럼 허용하지 않는 그에게 반감을 품은 병사들의 반항에 시달리다가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가 동방으로 와서 지휘권을 인수하자 로마로 쓸쓸히 돌아갔다. 글라브리오는 총독 직위를 마치고 로마로 돌아온 뒤 기원전 63년 [[루키우스 세르기우스 카틸리나]]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것을 지지했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그는 아이밀리아 스카우라와의 사이에서 아들 [[마르쿠스 아킬리우스 글라브리오(기원전 33년 집정관)|마르쿠스 아킬리우스 글라브리오]]를 낳았다. 아들 마니우스 기원전 33년 보결 집정관을 역임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